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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헵번은 1929년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벨기에, 영국, 네덜란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 제2차 세계 대전시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 기간 동안 영양실조와 고난을 경험하기도 했다.

어린시절부터 발레를 하고 촉망받는 발레리나였으나, 너무 큰 키(170cm)로 포기하게 되었다.

 

 

 

 

 

 

 

교육 여행 영화 "Dutch in Seven Lessons"로 처음으로 단역으로 영화 데뷔하였다.

 

 

 

 

 

1951년 브로드웨이의 연극 <지지>에서의 연기가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1953년 24살에 <로마의 휴일>에 캐스팅 되어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상 BAFATA상을 수상하였다.

 

 

 

 

 

 

1954년 <사브리나> 에 출연하여 주인공 사브리나역을 하였다.

이 영화에 입고 나온 지방시의 옷을 입고나와 크게 화재가 되었으며,  사브리나팬츠 사브리나플랫이

유행하였다.

 

 

 

 

1954년 연극 <운디네>에 같이 출연했던 멜 퍼레어와 결혼하고 큰아들 션헵번을 낳았다.

멜 퍼레이는 오드리헵번보다 12살이 많았고, 오드리헵번과는 4번째 결혼이었다.

오드리헵번은 남편을 위해 다른 거장 감독들의 작품을 거절하고 남편이 감독한 영화에 출연하거나,

전쟁영화에는 절대 출연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설득에 전쟁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남편의 바람기와 오드리 헵번에 대한 열등감으로 다툼이 잦았고, 여러번의 유산과 남편의 폭력성까지 나타나

결국 이혼하게 된다.

 

 

 

 

1959년 <파계>에 출연하였다.

 

 

 

 

1961년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출연하며 다시한번 그녀의 패션이 화재가 되었다.

티파니 보석상 앞에서 커피와 크루아상을 먹으며 보석을 바라보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가 되었다.

 

 

 

 

 

 

1963년 <마이 페어 레이디> 뮤지컬 영화에 출연하였다.

 

 

 

 

 

 

 

 

1964년 <어두워 질때까지>에 출연하였다.

 

 

 

 

1967년부터는 가족들과의 시간을 더 보내기 위하여 작품을 줄였다고 한다.

 

1969년 오드리 헵번의 열렬한 펜이었던 이탈리와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결혼하여

39세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남편의 외도로 인하여 13년 만에 이혼하였다.

 

 

 

 

 

 

 

 

 

1980년 네덜란드 배우 로버트 월더를 만나 사망할때까지 동거를 하였다.

 

 

 

 

 

 

 

1989년 <영혼은 그대 곁에>가 마지막 출연 작품이었다.

 

 

 

 

 

1954년부터 유니세프에서 봉사활동을 이어갔으며, 

영화계 은퇴이후 인권운동과 자선사업 봉사활동을 하며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였다. 

 

 

 

 

 

 

1992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대통령훈장을 받고  1993년 스위스의 자택에서 투병중인 대장암으로 별세하였다.

 

 

 

 

 

오드리헵번 리즈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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